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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칸트의 목적론적 역사이해 - 시민사회를 향한 꿈
    근대철학 2020. 6. 5. 08:56

    물리주의의 강력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약간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시각을 칸트는 「보편사의 이념」에서 아주 확고하게 드러낸다. 칸트는 인간의 역사를 태초부터 자연에 의해 설정되어 있는 목적(Zweck)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보편사의 이념」 제 1명제는 다음과 같다. “생명체의 모든 자연적 소질은 언젠가는 완전하게, 그리고 목적에 맞게 발현되도록 결정되어 있다.” 인간사가 아무리 무질서하고 우연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이면에는 이미 자연에 의해서 부여된 소질(Naturanlage)이 놓여있으며, 모든 인간의 활동과 역사는 그 자연적 소질이 미리 정해진 목적에 맞게 발현되어 가는 과정이다. 칸트는 인간의 자연적 소질이 이성의 사용으로 목표 지어져 있다고 본다. 이성의 사용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바는 제 5명제를 통해 규정되어 있다 : “자연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해결을 강요하는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보편적으로 법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의 건설이다.” 인간 유(Gattung)는 - 개인의 짧고 유한한 삶을 통해서는 결코 이성이 완결된 형태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 이성의 사용을 통해 동물의 상태에서 멀리 벗어나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법(Recht)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에 도달한다는 궁극적이고도 단일한 목표를 향해 운명 지어져 있다. 개개인들이 또는 사회 전반이 그러한 목표를 의식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인류의 역사는 자연이 부여한 태초의 성질에 의해 규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목적론 논증

    칸트가 「보편사의 이념」에서 자신의 목적론을 지지하는 논증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는 표현들의 연계를 통해 목적론을 뒷받침한다. 그것들을 모아서 하나의 논증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자연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연과 맹목의 지배만이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그러한 우연과 맹목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

    (3) 그러므로 자연에는 목적이 있다. ((1)과 (2)에 의해)

    (4) 자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향한다.

    (5) 인간은 자연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6) 자연의 흐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역사 역시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특정한 목적을 향한다. ((4)와 (5)에 의해)

    (7)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준 것 역시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6)에 의해)

    ∴ 인간의 역사는 이성을 사용하여 의지의 자유를 최대로 확대시키는 것, 즉 여러 사람의 자유가 공존을 이루는 시민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전제 (1)~(3)은 제 1 명제와 그 부가설명을 통해 제공된다. 이 부분은 귀류법의 형식을 띠고 있다. 자연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자연”만이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위안이 없는 우연(das trostlose Ungefähr)”만을 목격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자연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칸트가 처음부터 인간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증명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칸트는 인간사에는 자유가 작용하기 때문에 그 규칙을 파악하기가 어려워 보인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확실한 법칙의 존재가 비교적 쉽게 인정될 수 있는 자연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적어도 자연의 영역에 대하여서는 귀류법적 논증에 의해 자연적 목적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에 부합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 정해진 방향을 따라 운행한다고 믿는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인간사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기 위하여 칸트는 전제 (4)와 (5)를 도입한다. “자연은 쓸데없는 것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며, 또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필요 이상의 낭비는 하지 않았다.” 자연은 목적을 느슨하게 추구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모든 사건들을 철저히 자신의 목적을 향해 배열했다. 자연이 탄생시킨 존재인 인간의 소질도 따라서 우연에서 탄생해 표적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목적에 맞게 부여된 것일 수밖에 없다. 다만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Vernunft)과 의지의 자유(Freiheit des Willens)는 자연의 다른 모든 생명체들의 소질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만약 자연에 우연과 낭비가 가득하다면 이성과 자유의 출현 역시 우연 또는 낭비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총체적인 합목적성을 믿는다면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야생과 구별되는 특수한 목적을 향해 인간을 정립시켰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었으며 이성에 기초하는 의지의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이 이미 인간에 관한 자연의 계획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 유의 역사는 합목적적 자연의 계획에 안에서 출현한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최대한 완성된 형태로 실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분석을 정리하자면, 칸트는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귀류법적 증명을 먼저 수행한 후 인간 역시 자연이 출현시킨 존재로서 자연의 합목적성의 영향 아래 있는 존재임을 주장한다. 다음으로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목적을 향해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이성과 의지의 자유라는 소질을 부여받은 사건 역시 특수한 목적을 향했기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완성된 형태로 실현시키는 것이 인간의 목적임을 이끌어낸다.

     

     

    목적론과 결정론의 혼동

     

    위에서 살펴본 목적론 논증의 앞부분인 전제 (1)~(3)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증명기술은 귀류법이다. 칸트는 자연에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목적의 존재를 부정했을 때 생겨나게 되는 맹목적인 우연의 지배라는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어떠한 위안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귀류법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귀류법적 가정의 결과가 실제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 판명난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즉, 자연에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발생하는 상황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논증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위 논증의 문제점은 귀류법적 가정의 결과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가 목적 결정 사이의 개념 구분을 얼마나 날카롭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 특정한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강하게 동의한다. 그런데 그 결정된 방향을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태양이 약 50억 년 후에 적색 거성이 될 것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한다. 만약 과학자들의 이론과 계산이 옳다면 태양은 자연법칙에 의해 50억 년 후에 틀림없이 적색거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태양의 목적이 적색거성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만약 칸트가 자연에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통해 자연의 사건들이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가정을 의미한 것이라면 귀류법적 논증은 타당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사건들이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발생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존립 여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칸트가 자연의 결정론을 증명한 것이지, 목적론을 증명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게 된다. 목적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실제로는 결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칸트가 정말로 자연에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귀류법적으로 가정한 것이라고 해 보자. 그 경우 논증은 타당성을 잃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 그냥 표류하듯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하다. 결국 자연의 목적에 대한 칸트의 귀류법적 논증은 목적이라는 개념의 애매한 사용에 의지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목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는 것이 결정인지 아니면 정말로 목적인지를 확실히 규정해 보면 두 경우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목적과 결정 사이의 혼동은 전제 (4)~(7)과 결론에서도 혼란을 발생시킨다. 만약 목적 개념을 정말로 목적의 의미로 사용했다면, 앞선 귀류법적 논증에서 목적의 존재가 만족스럽게 증명되지 못 했으므로 전제 (4)의 설득력이 떨어지고, 따라서 논증의 나머지 부분도 증명될 수 없다. 반대로 만약 목적 개념의 뜻을 결정으로 해석할 경우, 칸트가 전제 (4)~(7)과 결론에서 언급하는 목적이라는 표현들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목적은 아니게 된다. 이성과 의지의 자유가 인간에게 부여된 사건도 법칙적으로 결정된 사건이었고, 그 이후로 그것들이 발전해나가는 과정도 법칙적으로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정되어 있는 결과가 인류의 목적인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결정되어 있는 것과 목적은 결코 같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그것으로 결정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어떤 결과와 배치되는 사건을 희망할 때에도 목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당첨되지 않을 것으로 결정되어 있을 것만 같은 복권을 그래도 구입하는 목적은 당첨에 있지 않은가?

    결정론 논증일 때에 비로소 타당한 논증인 것을 마치 목적론 논증인 것처럼 둔갑시키면서 칸트가 달성한 효과는 시민사회 건설의 윤리적 당위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가 보편적 법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의 당위성을 함축적으로 주장하는 부분은 매우 많다. 그 중 한 예가 “완전히 정당한 시민적 정치 체제가 인류를 위한 자연의 최고 과제임에 틀림없다.” 같은 표현이다. 과제(Aufgabe)라는 표현에는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밖에도 칸트는 “의도(Absicht)”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는데, 인간사의 배후에 자연의 의도가 있다는 식의 표현을 통해서 마치 인류가 그 의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처신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만약 목적론과 결정론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당위성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인간의 역사가 특정한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옳은지 사이에는 특별한 상관관계가 없다는 직관이 든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우리가 그 목적에 봉사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보편사의 이념」의 전반적인 논의는 이와 같은 목적과 당위성 사이의 직관적 연관성에 의존한다.

    저자: 이충녕, 서울대학교 철학과, 역사철학 강의 과제물 중 일부

    유튜브 채널 <충코의 철학>을 운영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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