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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를로-퐁티의 객관주의 비판
    현대철학 2020. 6. 5. 08:57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의 도입부에서 경험론(empiricism)과 지성론(intellectualism)을 주된 비판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의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에 앞서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암묵적이면서도 거의 예외 없이 유일한 두 형태의 가능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져 오던 경험론과 지성론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작업을 한다. 이 예비작업은 메를로-퐁티의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요청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현상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 경험론을 통해서도, 지성론을 통해서도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지성론과 경험론은 모두 현상을 마치 대상(object)처럼 바라보는 객관주의(objectivism)적 태도를 전제한다. 객관주의적 태도를 전제하는 사고방식 안에서 엄밀한 의미의 현상의 장(phenomenal field)은 들어설 틈이 없다. 객관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세계의 모든 부분은 대상으로 가득 차있다. 설사 세계 안에 빈 공간이 상정된다고 할지라도 그 공간 역시 일종의 대상으로서만 파악된다.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현상이란 대상들의 나타남의 총체로서, 그 자체도 일종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반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현상을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현상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바로 그럴 때에만 드러나는 현상적 장의 고유한 면모를 포착하려 한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학적 작업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는 객관주의적 태도와 아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 둘 사이를 뚫고 들어가 현상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마치 양성자와 중성자를 분리시키는 것처럼 힘들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가 경험론과 지성론을 비판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지론의 압도적인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독자를 이끌려는 처절한 노력이자 나름의 배려로 읽힐 수 있다.

    먼저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자. 경험론은 말 그대로 인간과 세계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경험을 가장 원천적이고 일차적인 진리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지론이다. 메를로-퐁티의 경험론 비판의 첫 번째 주된 논점은, 이러한 경험론의 기본적인 기조로부터 반드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험론 전통은 원자적 경험의 존재를 핵심 전제로 받아들여 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경험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 예를 들어 의자에 앉아서 교실 안을 바라보면 나의 시각적 범위 안에 수많은 감각경험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 경험론에 따르면 경험은 원자적인 요소로 분석될 수 있으며, 그 원자적 요소들이 조합되어서 총제적인 경험이 주어진다. 경험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생각되는 감각을 예로 들어보면, 경험론은 빨간색, 파란색, 회색, 특정한 진동의 소리 등 나에게 주어지는 원자적이고 순수한 인상(impression)들이 감각을 통해 주어져 감각경험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거나, 빨강, 파랑 등 성질(quality)이라고 불리는 대상의 속성이 감각을 통해 얻어지고 서로 결합하여 경험을 산출한다는 등의 설명을 내놓는다. 인상이든 성질이든, 경험론은 경험 요소들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최소 단위의 인자로 분해될 수 있다고 상정하며, 최소 단위들의 결합으로 부분이 구성되고 부분의 결합을 통해 전체가 구성된다는 식의 그림을 그린다. 메를로-퐁티는 경험의 전체론적, 공시적, 구조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경험론의 원자적 사고를 비판한다. “내가 보는 양탄자 위의 빨간색 부분은 오직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와의 관계 하에서만 빨갛다. 그것의 질은 빛의 역할과의 관계 안에서만 드러나며, 따라서 공간적 배치 안에서의 한 요소로서만 드러난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원자적인 빨간색 인상이나 빨간색 성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빨간색에 대한 감각은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전체적인 감각경험에 이미 빨간색의 감각은 들어와 있다. 그러나 빨간색은 현재 주어지는 경험 전체와 경계가 흐릿하면서도 분명히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는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최소단위의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현재 주어진 전체적 경험 그대로 직시하면 원자적 인상이나 질은 경험론의 공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메를로-퐁티의 경험론 비판의 두 번째 주된 논점은 경험론이 지각을 외부 자극에 상응하는 기계적·생리학적 반응의 조합으로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상응가설(constancy hypothesis)이라고 불리는 이 지론은 원자적 경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상응가설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기관은 최소 단위로서의 미세한 외부적 자극들을 개별적으로 수용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그 미세한 개별 자극들에 각기 상응하는 미세한 개별 반응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반응들이 종합된 결과가 일련의 움직임, 행동, 행위이다. 메를로-퐁티가 상응가설을 반박하는 하나의 길인 주의(attention)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상응가설이 옳다면, 감각경험의 모든 요소는 주의를 받기 이전에 이미 감각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주의는 무의식에 물러나 있거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 하던 감각요소에 빛을 비추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주의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나 관심 받지 못 하던 것에 새로이 가늠쇠를 맞출 뿐이다. 주의의 빛은 이미 주어진 감각 요소들 중 어디에든 비춰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이고 자유롭다. 메를로-퐁티는 상응가설의 이러한 결론이 경험의 변화무쌍하고 창조적인 측면을 설명하지 못 한다고 주장한다. 주의는 이미 감각이 주어지고 난 다음에 사후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주어지는 감각 자체를 동시적으로 변형시키는 행위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단지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것들을 더 명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형상(figur)으로 취함으로써 그것들 안에서 새로운 표현을 실현시켜내는 것이다.” 주의를 통해 그 전에는 불분명한 지평으로서 주어져 있던 것에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분명한 범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돌출되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감각기관이 수용하는 자극 자체가 새로이 설정되게 된다. 이러한 창조적이고 동시적인 형상 설정 행위가 있기 이전의 상태를 가정하고, 흰 백지처럼 자유로운 그 상태에 존재하는 감각 자극과 그것에 상응하는 반응을 상정하는 일은 실제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와 과정을 자의적으로 상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경험론 반박의 두 주요 논제를 살펴보았지만, 메를로-퐁티는 경험론이 어떤 의미에서 반박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원자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고 상응가설에 들어맞는 개별자극과 개별반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해도, 경험론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반응 종합 모델을 제시하여 경험의 전체론적, 공시적 특성이 원자적 존재자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과정을 새로이 설명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반박이 제기되더라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듯 어차피 경험론을 완전히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경험론 반박의 보다 근본적인 층위를 이뤄야 하는 것은 경험론이 가진 객관주의적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경험론은 기본적으로 경험에 주어지는 대상들이 외재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존재한다고, 대상이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고 즉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그러한 객관주의적 사고방식의 한계는 그러한 객관적 사물들의 운동과 결합을 아무리 정밀하게 추적해도 결코 주체의 경험 자체가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경험론의 객관주의적 접근 방식을 통해 경험의 근사치에 해당하는 설명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서는 불분명한 배경과 또렷한 형상이 흐릿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며 그것들이 매순간 교차하고 서로 교체되며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구성요소들을 특정하여 제시할 수 없다. 따라서 명확하게 기술되고 한정되어 있는 객관적인 대상적 요소들로 경험 자체를 구성해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경험에 남겨놓을 수밖에 없다. 경험론은 “감각을 사물로서 소개하지만, 경험은 정확히 그곳에서 의미 있는 전체로서 이미 나타난다.” 경험론은 끊임없이 경험적 실재에 대한 근사적 설명을 제시하지만 결코 현상 자체에는 이르지 못 한다.

    다음으로 지성론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비판을 살펴볼 것인데,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이미 수행한 이상 지성론 비판은 더욱 쉽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지성론은 뒤집어진 경험론이기 때문이다. 지성론이란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여 지성적인 정보로 바꾸어내고 그것들로부터 경험을 구성해내는 선험적인 지성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지성론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유형에 상관없이 대체로 경험론의 객관주의적 전제를 그대로 공유한다. 외부적인 감각자극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경험이 주체의 산물이라는 극단적 지성론이 있는데, 그 경우 객관적이고 즉자적인 존재자로 상정되었던 경험적 대상이 지성적 주체로 완전히 대체된다. 주체는 어떠한 시선도 받지 않은 채 깨끗한 공간 안에 자기동일적으로, 자기 자신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 지성론은 과학적 영역에서 영향력이 크지는 않고, 조금 더 완화된 형태의 칸트 식의 초월적 지성론이 본격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완화된 지성론에 따르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극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맹목적이다. 주체는 맹목적인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범주 하에 그것을 조직화하여 의미를 가진 경험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이중의 객관주의적 사고를 목격한다. 먼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이 경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대상으로 상정된다. 또한 지성적 주체 역시 외부 자극을 초월하는 존재, 객관적인 존재로서 세워진다. 사실 주체를 객관적이고 즉자적인 존재로 세워놓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극단적 지성론이나 완화된 지성론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체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완화된 지성론에서 역시 주체는 아무런 시선도 필요 없이 절대적으로 존립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따라서 지성론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반박불가능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론은 언제나 경험의 근사에 해당하는 설명을 제공할 뿐이지, 경험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는 결코 다가가지 못 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지성론을 비판하는 한 사례인 판단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지성론에서 판단은 “지각이 가능하기 위하여 감각이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모자와 옷으로 가려진 형체를 보고 그 속에 사람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언제나 두 개의 이미지를 얻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물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 감각을 넘어서는 판단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판단은 외부적 감각자극과 분리된 상태에서 순수 지성의 힘으로 수행되는 하나의 독립적인 논리적 수행 작용이 된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감각자료는 오히려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료에 대해 사후적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가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지각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지각을 살펴보면 감각과 판단은 경계가 흐릿한 채로 혼재되어 있어 둘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착시효과는 감각에서 비롯하는가, 판단에서 비롯하는가? 종이 위에 그려진 정육면체는 서로 다른 두 부분이 번갈아가며 돌출되어 나타난다. 가만히 정육면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두 관점 중 하나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그러다 잠시 후에 전혀 다른 두 번째 관점이 퍼뜩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 나는 두 관점이 모두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의 마음대로 관점을 바꿀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하나의 관점에서 정육면체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관점이 번뜩하고 나타난다. 지성론은 변하지 않은 객관적인 감각자극에 대해 지성이 서로 다른 두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하겠지만, 실은 이미 감각 수준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 변화하는 감각은 판단을 변화시키고, 변화하는 판단은 또 다시 감각을 변화시킨다. 이 관계는 원초적이다. 실제로 지각을 그대로 들여다보면 감각과 판단은 상호침투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둘의 상호작용은 명확히 도식화하여 분석될 수 없다. 감각과 판단을 상호 독립적인 과정으로 구분하려는 지성론은 “지각된 대상의 존재와 공존의 방식을 보지 못 하며, 시각적 장에 퍼뜩 떠오르고 비밀스럽게 그 부분들을 묶어내는 삶을 보지 못 한다.” 그리하여 지성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되려고 하나 어디까지나 실제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이론으로 남는다.

    저자 : 이충녕, 서울대학교 철학과, 현대프랑스철학 과제물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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